2.6 자유의지
2.6 자유의지
1.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
나는 어릴 때부터 신앙을 가지고 자라면서, 점점 청년이 되어가면서 하나님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나의 자유의지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신앙 생활에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 자유가 동시에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해결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면 인간은 마치 로봇처럼 단순한 기계에 불과하게 되고,
반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만 강조하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선택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며, 자유의지를 이해하기 위해 "독자적인 행동에 따르는 책임"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모든 영역에서 완전한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는 죄로 인해 자유의지가 왜곡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힘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영향력을 극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며,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두 가지 이미지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1) 해방자의 은혜
-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의 영향 아래에서 포로 상태에 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 의지를 해방시키면, 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 치유자의 은혜
- 인간은 병든 환자와 같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의사처럼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을 치료해 주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자유의지는 죄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2. 내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자유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꿈꿉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사실 아주 제한된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으면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없거나 건강이 좋지 않다면 여행을 가지 못합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차를 사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조차도 환경과 조건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자유는 제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만이 절대적인 자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를 "종의 멍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실제로는 우리를 옭아매는 멍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
세상적인 자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자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해도,
그 자유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유라면 결국 우리를 죄의 멍에에 묶어놓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는 우리를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 일요일마다 교회를 가야 해서 여행을 자유롭게 못 간다.
-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해야 해서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
- 모임과 봉사로 인해 시간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자유는 순간적이고 제한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영원하며,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유를 선택해야 할까요?
세상의 자유는 우리를 더 얽매이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우리를 더 큰 기쁨과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라디아서 5:13)
우리는 육체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참된 자유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유이며,
우리를 참된 기쁨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주권 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앙의 블랙홀 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회피합니다. 질문을 받으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거나, "잘 모르겠다" 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함께 이해할 수 있을까?" 를 연구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키기 위해 "타협점" 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 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지만, 인간은 제한된 시야로 세상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까지 아시지만, 우리는 현재만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죄와 자유의지의 연관성
사람은 얼마나 쉽게 죄에 빠지는 존재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도원에서 방문자에게 '창문 밖을 내다보지만 않으면, 방 안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방문자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수도사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내다보지요.' 수도사들이 말했습니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 『이신칭의』 중에서)
"사람들은 반드시 내다보지요." 이 말은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유의지를 죄 짓는 데 사용 합니다.
"하지 말라" 고 하면, 오히려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로마서 7:19)
사도 바울조차도 선을 행하고 싶었지만, 죄를 짓는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선택할 자유 가 있다고 해도,
현실에서는 죄를 짓는 선택을 더 자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와 죄의 관계 입니다.
5. 과연, 누가 한 것인가?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나의 선택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인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하나님이 하셨다" 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요셉을 노예로 팔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 (창세기 45:7~8)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을 팔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신 일"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의 악한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됩니다.
(2) 모세가 지팡이를 내려치다
모세가 광야에서 물을 내는 기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기적은 호렙산 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반석을 쳤고, 물이 나왔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 (출애굽기 17:1~6)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팡이로 반석을 쳤고, 하나님께서는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적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물이 없다고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번에는 반석을 치지 말고 말로 명령하라 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전처럼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민수기 20:7~12)
첫 번째 기적과 두 번째 기적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적에서는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하셨고,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적에서는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지팡이로 두 번을 쳤습니다.
모세는 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식이 아니라, 이전의 방식대로 행동했을까요?
그는 이전에 했던 방식 에 익숙했고, 그때도 물이 나왔기 때문에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행동을 불순종으로 판단하시고, 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들을 정해 두셨습니다.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 (민수기 14:22~23)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모세가 반석을 친 것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일 이었습니다.
(3) 땅을 세 번 치고 그친 요아스 왕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특별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18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19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 (열왕기하 13:18~19)
요아스 왕은 땅을 세 번만 치고 멈췄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가 더 많이 쳐서 아람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결국, 요아스 왕이 세 번만 친 것 때문에 이스라엘도 아람을 세 번만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연이었을까요?
요아스 왕이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세 번 친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이 세 번만 승리하도록 계획하셨던 것일까요?
우리가 삶에서 선택하는 많은 것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지팡이를 치게 하셨고, 요아스가 세 번 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